登陆论坛  注册会员 忘记密码?
最新文章 News Center
热点文章    
相关文章
 
当前位置: 历史风俗 >> 민족문화상징

민족문화상징

민족스포츠 - 태권도, 활, 씨름

■ 종주국으로서 기품 추스르자


user posted image
인삼처럼 태권도 종주국도 한반도다. 그러나 인삼과 달리 태권도의 족보는 복잡하고 불투명하다. 박정희 시대 일본식 가라테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퓨전’이므로 우리 것이 아니란 주장도 난무한다. 스포츠계에서는 태권도가 인정받고,국가무형문화재 정책에서는 택견이 인정받고 있다. 택견 조차도 파벌이 너무 복잡하여 연일 소송중이며, 인터넷상의 논쟁이 그칠 새 없다. 북한과 남한의 태권도도 분단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싸움은 끝도 없고, 영원한 승자도 없을 듯하다. 민중 스포츠로 이어진 만큼 국가가 공인한 공식적 계보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한즉, 태권도나 택견 논쟁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종주국답게 제대로 조직을 추스르고 기품 있는 민족 스포츠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공터에서 태권도를 하면서 한국말로 ‘하나 둘 셋’을 외치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드는 느낌은 싫지 않았다.

■ 주몽 솜씨 이어받은 양궁선수들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활은 또 어떤가? 오늘날 국궁은 우리끼리만 즐기는 스포츠로 잔류했지만, 양궁 선수들이 눈썰미 좋게 국제대회를 휩쓰는 것을 보면 국궁의 전통은 고스란히 이어지는 중이다. 본디 주몽이란 이름도 활 잘 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고구려나 발해 등은 일찍부터 활을 잘 만들고 잘 쏘았다. 수출 품목에도 올랐으니 당대 첨단무기로 돈을 벌어들이는 무기수출국가였던 셈이다.

활에서는 유목 민족 냄새가 난다. 우리는 농경 민족으로 잔류하면서 말 타고 호랑이 사냥하던 기백과 유목적 풍류를 잃고 말았다. 그나마 활 문화가 천년 이상 지속되고 있어 태곳적 건장한 사내들의 취미요 오락이요 국방력이었던 그 순간을 웅변해준다. 더군다나 옛적엔 여인들도 활을 즐겨 쏘았으니, 양궁을 쏘는 낭자들 팔뚝에는 동이족의 문화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 신명 꿈틀대는 ‘동네 모래판’으로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씨름도 용케 살아남았다. 하지만 일본 스모가 세계적 선수들을 불러모으고 괴력난신의 묘기로 판을 장악한 데 반하여 우리 모래판은 조금 쓸쓸하다. 스모와 씨름은 출신 족보가 다르다. 국가주의 신도와 결합된 파시즘적 열광이라고나 할까, 짐짓 그런 냄새를 풍기는 스모에 비하면 씨름은 본디 서민적이다. ‘동네 장사’가 백중장터 씨름판에서 당당히 황소를 끌고 돌아오는 ‘민중영웅’의 출현 방식을 띠었기 때문이다.

장터 씨름판은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승부 게임만 남은 것은 분명 씨름판의 진화일 수도, 왜곡일 수도 있다. 국가적 체급경기와 별도로 시골 장터의 씨름판, 동네 꼬마들 씨름판을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 씨름판의 흥겨움과 신명을 삶에 지친 서민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면 용기를 내어 판으로 뛰어들고, 끝내 임꺽정 같은 장사를 만나서 ‘묵사발’이 되고, 덕분에 구경꾼들은 신명 나는 그런 ‘무모’한 동네 모래판 말이다. 민족스포츠의 생활화야말로 문화의 힘이리라.

■ 독창성·주체성 갖춘 건강법 총화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인삼, 각종 민족스포츠 등이 문화상징에 포함되었다면 건강법을 총화한 책자 한권 쯤도 100선 반열에 올려둬야 하리라.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압축한 〈동의수세보원〉 같은 책자도 소중하나 역시 독창성·주체성 등을 골고루 갖춘 〈동의보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의보감〉 역시 널리 알려진 만큼 잘못 알려진 대목들이 많아 오히려 ‘신성성’을 되찾아야 할 듯하다.

〈동의보감〉과 ‘대장금’으로 이어지는 한류는 하나의 연맥관계이리라. 대장금으로 알려진 이영애가 한국 인삼을 중국에 선전하는 모델로 뽑혔다는 사실도 그렇다. 인삼, 활, 태권도 할 것 없이 종주국의 위엄과 자격을 만방에 고할 일이다.

ⓒ주강현 한국민속연구소장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김치, 고추장, 된장과 청국장

조화’로 버무리고 ‘여유’로 발효시킨 전통의 지혜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 김치
우리는 한때 김치를 배척한 적이 있다. 우리답게 요란스럽게. 김치에서 나온 기생충 알이 호들갑의 빌미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것이면 무조건 경멸해 마지않던 풍조와 궤를 같이한다. 김치 냄새 싫어하는 서구인들 비위 살피며 맵고 짠 맛을 핑계로 위암 등 각종 질환의 원인으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외국인들이 낯설어한다고 전통 문화를 미개, 미신 문화로 치부했으니 의아해할 일도 아니다.

공동체 삶의 산물인 전통문화가 21세기 문화콘텐츠 보고로 부각되면서 김치의 의미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콩을 발효시킨 장류, 곡물·과실로 빚은 주류·식초 등과 함께 과학이 증명한 ‘인류 음식문화의 백미’로 칭송되기도 한다. 심지어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 예방에 도움 주는 ‘의료식품’으로도 떠받들어진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도 스트레스 해소 등의 탁월한 효능을 ‘과학’의 이름으로 강조한 바 있다.

비위생적이라 비하한 것도, 건강 효과를 내세운 것도 과학이니, 덩달아 춤출 일은 아니다. ‘우리 게 좋은 것이여!’에 편승한 또다른 쏠림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라도 김치의 문화적 의미는 차분하게 따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김치는 조화와 융합의 발효식품이다. 김치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것들의 융합을 꾀하고 나서도 성숙의 무르익음을 기다려야 한다.

근래 전통문화에 주목하는 건 돈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치에 관심을 갖는 게 건강 장수에 좋기 때문만도 아니다. 과학과 발전의 이름으로 팽개친 전통 삶의 지혜에서 피폐한 자본세상, 개인주의적 삶의 대안을 꾀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김치는 조화와 융합의 발효식품이다. 우리가 버리고 온 공동체적 삶에서 확인되듯 이질적 요소들이 뒤섞여 전혀 다른 새 가치로 재탄생한 먹거리다. 배추와 소금, 고추와 마늘 등 양념들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한데 어울려 탁월한 시너지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김치는 억지 부리지 않는다. 시간이란 불가항력을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김치를 ‘만든다’고 하지 않고 ‘담근다’고 한다. ‘담근다’엔 ‘삭힌다’ ‘익힌다’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삭고 익기 위한 기다림을 거쳐야만 독특한 맛과 향이 살아난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며 거친 개성의 모남을 누그러뜨리고 각종 양념과 버무려 이질적, 대립적인 것들의 융합을 꾀하고 나서도 무르익음을 기다린다. 인위가 작용하지만, 완성은 시간의 흐름과 발효라는 자연의 생성변화 원리가 작용해야 이뤄지는 셈이다.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김치를 담그고 나눠 먹는 과정에서도 공동체적 온기는 확인된다. 옛날 김장은 모내기와 더불어 두레 품앗이의 대표적 사례였다. 김장하고 이웃 모르쇠 하기가 지금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의식에 유습처럼 남아 있다. 최근 외국산 김치 수입이 급증한 것도 공동체적 삶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함께의 정신’은 김치와 다른 음식과의 관계에서도 보인다. 아무리 좋아해도 김치만 따로 먹지는 않는다. 밥이나 고기, 하다못해 고구마, 라면이라도 함께 챙겨야지 성인병에 좋다고 김치만 먹지는 않는 것이다. 오훈채나 쌈, 비빔밥처럼 한국 음식은 “여러 맛 겹치고 한데 엉겨 조화를 이루는 데 큰 특성이 있다.” 각각의 요리를 순차적으로 즐기는 서양이나 중국 등과 다르게 모두 한 상에 차려놓고 함께 먹는다. 어느 분 지적처럼 “한국 음식은 관계의 틈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또 하나, 김치야말로 퓨전음식의 모범이다. 18세기 야채 절임과 고추의 그 극적인 만남과 뒤섞임이 없었다면 오늘날 김치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이질적 문화가 만나 새 문화로 거듭난 성공적 예라 할 수 있다. 세계화 이름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충돌하는 요즘, 새로운 문화 창출을 위해서라도 김치가 보여준 좋은 선례를 유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user posted image
■ 패스트푸드에 맞선 ‘느림의 맛’
된장·청국장·고추장오천년
김치와 더불어 발효과학의 총아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된장, 청국장, 고추장이다. 이들 역시 자연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느리게 기다리며 숙성시킨 ‘슬로 푸드’다. (영어엔 슬로 푸드란 표현이 없다. 패스트푸드를 비튼 이 말에는 햄버거 따위에 대한 비아냥, 세계화 물결에 대한 불복종의 의지가 서려 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먹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으나 산업문명 탓에 속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자동차의 덫에 걸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식생활조차 조급함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자극적인 것만 찾아 우리들 심성도 점점 더 성마르게 되어간다.

한때 된장·고추장을 홀대했던 것은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의 속도와 화려함에 취해 오래 묵을수록 제 맛을 내는 이들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으니 피자와 햄버거만 좇다가 비만의 멍에를 쓰게 된 꼴이라! (하여 이제부터라도 ‘된장녀’처럼 우리 문화를 비하하는 듯한 말들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느림의 음식을 천천히 즐기는 여유로움은 반생태적 삶의 대안

물론 “발효는 과학이다!” 그러나 발효에서 보아야 할 게 영양이나 건강만은 아니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더딘 성숙의 과정이다. 무르익음을 기다릴 줄 아는 느긋함의 심리학이다. 된장이나 청국장, 고추장은 우리 몸에 좋은 양질의 영양소를 함유한다. 현대 과학이 이를 앞 다투어 증명해주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느림의 음식들을 천천히 즐길 줄 아는 마음의 여유로움이다. 영양제 먹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과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발효과학의 총아들도 별 무소용인 것이다.

이 발효식품들의 느린 성숙을 지켜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옹기다. 옹기 또한 편리함만을 내세워 한때 플라스틱 그릇에 밀린 바 있다. 요즘 다시 건강에 좋다고 각광을 받기 시작했지만 여기서도 더 주목할 것은 그것이 지니는 생태적 의미, 즉 스스로 숨을 쉬며 더딘 무르익음을 보장해주는 그 ‘느림의 미학’인 것이다. 옹기 자체가 흙과 물, 그리고 불이 만나 오랜 ‘성숙’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으로 속도와 편리성과는 거리가 있다.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편리성만을 중시하는 조급함이나 건강을 지나치게 챙기는 ‘건강염려증’이 오히려 정신은 물론 육체의 건강까지도 해칠 수 있다. 건전한 정신만이 건전한 육체를 보장해준다. 우리가 김치나 고추장, 된장 등 전통 발효식품에 주목하면서 거창하게 ‘잃어버린 공동체’ 운운하는 것도 현대 산업문명이 조장하는 반생태적 삶의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뜻일 것이다. 하늘을 거역하면 망하고 순응하면 흥한다. 음식문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음식의 ‘문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복, 색동, 다듬이질
장롱속 깊은 잠…‘바람의 옷’ 환생을 꿈꾼다

user posted image

» 혜원 신윤복의 (왼쪽)와 문화방송 드라마 의 주인공 윤은혜.

■ 한복
‘입는’ 옷에서 미디어속 ‘보는’ 옷으로

우리는 언제나 한복의 아름다움을 예찬해왔다. 선이 날렵하다, 우아하다, 자연스럽다 등 늘 한복에 따라다니는 찬사다. 어떤 디자이너는 한복을 ‘바람의 옷’이라고 부르며 해외에 알리고 있기도 하다. 한복은 민족이 누려온 오랜 의생활의 산물이며 영혼이다. 그런데 지금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가 문제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실생활에서 한복을 거의 입지 않는다. 더이상 한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은 한복이라는, 영혼을 담는 육체 자체가 소멸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복은 점차 현실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한복이 새 육체를 얻고 있다. 그것은 미디어다. 영화 , , 와 텔레비전 드라마 , 과 같은 사극 속에서 한복은 다시 생명을 잇고 있다. 사극을 영어로는 ‘코스춤 드라마’(코스프레가 아니라)라고 하는데, 사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바로 시대복이기 때문이다. 사극 속 한복은 고증에 충실하기보다는 시청자들의 감각에 맞춰 화려하게 디자인된 또 하나의 스펙터클이다. 의 퓨전 한복은 이런 경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다.

아무튼 오늘날 한복이 가장 활발하게 살아 있는 곳은 현실공간이 아니라 영화나 텔레비전 같은 대중매체 속에서다. 이제 한복은 ‘입는’ 옷이 아니라 ‘보는’ 옷이다. 한복과 관련한 어떠한 접근도 이런 인식에 바탕하지 않는 한 빗나간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시대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복은 반드시 ‘입는’ 옷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스펙터클화한 한복의 의미를 읽어낼 수 없다.

물론 현실에서 사라진 대신 미디어 속으로 들어간 한복, 그리하여 스펙터클화된 한복을 한복의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의 문제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더욱 많은 문화유산들이 미디어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리라는 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한복이나 도깨비 등이 모두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민족문화의 이미지 아카이브로만 존재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전통의 미디어화야말로 문화유산을 콘텐츠화하려는 현재적 욕망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한복은 원형대로 지속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이런 상태에서 한복의 지속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스크린이나 텔레비전에서 재생되면서 민족의 기억 속에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 해체되어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전자가 이른바 이미지로서의 삶이라면 후자는 해체에 따른 재창조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일본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미야케 잇세이나 가와쿠보 레이 같은 일본 디자이너들은 전통 기모노를 해체하여 새로운 패션으로 재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만약 한복이 미디어 속에서만 살아가는 데 만족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오리엔탈리즘을 팔아먹을 것이 아니라 과감한 실험을 마다하지 않아야 할 일이다.


■ 색동
질서에서 탈출한 색채의 유희

“어떤 색을 좋아하세요.” 흔히 주위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선호하는 색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을 알아맞추는 게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물음을 조선시대 사람에게 한다면 넌센스가 될 것이다. 옛 사람이라고 해서 나름대로 좋아하는 색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색을 개인적 속성과 연결시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에게 색이란 객관적인 의미 체계이지 개인적 선호의 대상은 아니었다. 색이란 원래 상징 질서에 속하는 것이므로 객관적이고 사회적이며 심지어 우주적인 것이기도 하다. 개인은 사용할 뿐 결코 의미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색채 질서는 오방색(五方色)이다. 오방색은 말 그대로 동서남북과 중앙이라는 다섯 방위에 대응되는 색채 질서다. 이를테면 적색은 남쪽, 흑색은 북쪽이란 식이다. 오방색은 전통사회의 모든 생활과 시스템에 대응된다. 오늘날 우리는 동쪽이 청색이고 서쪽이 백색을 의미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눈에 오방색이란 형이상학적 표상이 아니라, 그저 울긋불긋 화려한 색채의 조합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엄격한 색채 질서 속에서도 자유분방한 조합이 가능한 것이 있었다. 색동이 그렇다. 색동은 여러 색의 옷감을 잇댄 배합을 가리킨다. 색동저고리, 색동치마가 다 그런 것이다. 색동은 오방색이란 색채의 형이상학적 질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코디네이션 방법이었다. 흔히 몬드리안의 추상화에 비견되는 조각보도 일종의 색동 배색이라 할 수 있다. 오방색의 엄격한 질서 바깥에서 나름대로 자유로운 색채의 유희가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학교에서 오방색이 아니라 삼원색을, 색동이 아니라 먼셀의 색상표를, 명도와 채도를, 보색을 배운다. 오방색이나 색동 같이 강렬한 원색으로 이루어진 코디네이션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리 세련되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전통 색채문화를 대표하는 개성적 배색임은 분명하다.

색동을 현대적 방식으로 사용한 좋은 예는 바로 아시아나항공의 색채 디자인이다. 항공기 꼬리날개, 승무원 유니폼 등에 사용된 색동은 현대적이면서도 세련되어 보인다. 더구나 아시아나 항공의 아이덴티티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가 외국 CI회사였음은 흥미롭다. 그들 눈에도 색동이 가장 한국적인 색채 코디네이션으로 인식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 다듬이질
주름진 삶 펴는 ‘타타타’

user posted image
1988년 가을 서울올림픽 전야제, 일순간 조명이 꺼지고 똑딱거리는 소리가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석학 이어령씨의 아이디어였다는 다듬이질 퍼포먼스. 바로 다듬이질이 가장 한국적인 소리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다듬이질은 공감각적이다. 무엇보다도 다듬이질은 빨래한 옷가지를 반듯하게 펴기 위해 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가사노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분명 옛 아낙네들의 노동이었지만, 노동의 고됨을 반복되는 동작과 리듬으로 달래보려는 구절 없는 노동요이자 퍼포먼스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는 도마질이나 절구질도 비슷했을 것이다. 옛날에는 노동과 놀이가 일체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다듬이 방망이를 두드리는 일이 당시 여성들에게는 생활의 주름을 펴는 일이자 가부장 사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더러는 북어 대가리를 두드리거나 생선을 물고 달아나는 도둑괭이를 좇을 때 사용되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이제 그것도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다. 현재 기성세대에게는 어릴 적 대청마루에 누워서 본 어머니의 다듬이질하는 모습이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자동세탁기와 다리미로 옷을 세탁하고 건사하는 시대에 다듬이질이란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도 세탁기 광고에서 ‘팍, 팍’ 같은 효과음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리들에게 다듬이질 소리의 잔청이 남아 있는 것일까. 어쩌면 오늘날 다듬이질의 유전자는 난타와 같은 ‘넌버벌(비언어) 퍼포먼스’를 통해 계승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범·디자인 평론가
[url=http://www.hani.co.kr/]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백두대간과 백두산, 금강산 · 동해 · 독도 · 대동여지도 · 무궁화 · 태극기

user posted image

■ 오천년 역사 지탱한 한반도 등뼈 : 백두대간과 백두산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불과 14개월 동안 한반도를 둘러보고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 산맥 분류법을 제시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산맥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지질학적 발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잃어버린 백두대간 되찾기’는 국토에 가해진 모멸을 벗겨내는 과거사 청산작업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은 조선 후기에 신경준의 〈산경표〉 등에 집약되지만 기실 한 개인의 창조물이 아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형성된 전통적 산맥 개념이 백두대간으로 압축되었다. 두말할 것 없이 한반도의 등뼈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려 낭림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르고, 남서로 방향을 틀어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그리고 지리산에 산맥을 드리운다. 백두대간이 강역 상징의 으뜸일 수밖에 없음은 자연과 인간, 역사와 삶의 드넓은 폭과 깊이를 두루 껴안고 있기 때문이리라.

등뼈의 정수리에는 천지를 품은 백두산이 좌정한다. 최남선은 ‘백두산 근참기’에서 이르길, ‘조선 인문의 창건자는 실로 이 백두산으로써 그 최초의 무대를 삼아서, 이른바 홍익인간의 희막(戱幕)을 개시하고, 그 극장을 이름하되 신시라 하였다. 단군의 탄강지요 조선국의 출발점이다’라고 하였다. 안재홍도 ‘백두산등척기’에서 ‘통철무애의 신비경’을 노래하며 대백두를 성모산 중의 성모산으로 보았다. 신화가 창조된 공간으로서 한민족이란 관념의 형성과 전승에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으니 백두산의 상징 층위는 고대적·신화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함부로 다뤄 백두대간 곳곳 상처
중국은 백두산공정으로 위협
한반도 등뼈가 휘청거리고 있다
백두대간과 백두산 따위가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올해 강원도를 휩쓴 엄청난 큰물 피해는 등뼈의 가지들을 함부로 다룬 죗값이다. 생태환경운동의 맥락에서 백두대간 지키기 등이 이따금 벌어지고는 있으나 곳곳의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어긋난 상태이다.

백두산은 안전한가. 중국은 바야흐로 대대적인 창바이(백두산) 개발에 나서며 영유권 선점을 위하여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동북공정의 폭과 넓이가 발해공정·백두산공정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창바이인삼’을 상표화해 세계무대에서 고려인삼과 판갈이 싸움을 예고하고 있어 조만간 인삼조차도 원조 다툼이 가시화될 것이다.

이러한 마당에 탈민족 담론의 불씨를 지피려는 안간힘도 강하게 불고 있으니 한반도의 등뼈가 휘청거린다. 민족관념의 과잉이 가져올 후과를 걱정하면서도, 간도의 해결되지 않은 옛땅과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도 비록 민족상징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들추지 않을 수 없으리라.

■ 동해표기·독도영유권… 도전받는 미래의 평화 : 금강산 · 동해 · 독도 · 대동여지도 · 무궁화 · 태극기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신의 손길은 위대한 산을 만들어 내고, 인간은 문화를 만들어 낸다. 금강산이 바로 그것이다. 제대로 된 작품 하나쯤은 만들어 두고 싶었던가, 신은 기어이 금강산을 빚어냈다. 진경산수의 겸재 정선을 비롯하여 ‘금강산 마니아’ 양사언 등 시인묵객들이 가히 ‘금강산학’이라 부를 만한 그 무엇을 탄생시켰다.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에서 금강산은 필수 순례지다. 신라의 화랑 영랑을 비롯하여 21세기 순례객에 이르기까지 장기 지속성과 보편성·통속성·예술성 등을 두루 갖춘 민족의 명산이 아닐까. 온갖 철학적 명상으로부터 일만이천봉 골골마다 끊이지 않던 절집 풍경소리, 그리고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노래하는 ‘나무꾼과 선녀’에 이르기까지 ‘금강산학’의 문화사적 계보는 그야말로 방방곡곡에 진지전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민족의 문화상징은 방방곡곡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 진진포포(津津浦浦) 바다로도 나아가야 한다. 서해, 남해, 동해 삼면이 바다인데 그 중에서도 동해가 눈길을 끈다. 문무대왕이 동해용왕이 되어 왜구를 막는 수호신이 되겠다고 비장한 유언을 남겼던 동해에는 오늘날에도 ‘신왜구’의 준동이 심상찮다. 세계지도 표기의 90% 이상은 동해(East Sea)보다 일본해(Sea of Japan)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불러왔는데 동해가 아니라 일본해란다. 한국인끼리야 당연히 동해라고 부르지만 어디까지나 ‘국내용’일 뿐 국제사회에서는 다르다. 1929년에 열린 국제수로기구(IHO)에서 처음으로 바다 명칭을 공식화할 때, 식민지로서 자신의 견해를 펼 수 없는 조건이어서 일본해가 국제적 공인을 얻게 된다. 즉, 1929년에 발간된 〈해양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에 일본해로 등재된 데서 사달이 발생하였다. 몇십쪽에 불과한 얇은 책자가 동해의 장래 운명을 바꾸어버린 것.
목각의 깊이 · 나이테의내력 사라질까
충성과 맹세에서 해방된 태극기 물결
독도에 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불요하리라. 다만,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대항해를 해본 적이 있는데 정말 실감나는 대목이 하나 있으니 그 넓은 동해에서 마주친 유일한 섬은 독도와 울릉도뿐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독도는 동해의 화점(花點) 같은, 신이 내린 황금의 섬이다.

백두산으로부터 동해, 독도에 이르기까지 ‘백두산 공정’으로, 동해 표기 문제로, 독도 영유권 문제로 이래저래 사달이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하여 불행한 일이다. 오늘의 한반도 강역의 안전망이 도전받고 있다는 증거이니, 태곳적부터 우리 것이 확실한 강역 자체를 브랜드로 만들기까지 해야 하는 문화사적 과제가 21세기 국제사회의 현실로 도출된 셈이다.

이러한 강역의 상징을 절절하게 묘사한 거작이 있으니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다. 그의 손길로 우리 강토가 비로소 온전하게 드러났다. 지도 이해는 바로 근대국가의 영토적 관념의 형성과 밀접하다. 21세기 고산자의 후예들은 전자문화지도 같은 첨단 지도로 무장하고 위성통신을 이용한 3차원 지도를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대동여지도의 목각판이 전해주는 나이테의 내력과 목각의 깊이, 칼날의 각인 등이 사라질 이유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디지털이 편리하다고 해서 아날로그 지도를 창고에 처넣을 것인가.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 오른쪽 위부터 야생화와 어우러진 백두산 천지의 여름, 하늘을 찌를 듯한 금강산 만물상, 쪽빛 하늘을 닮은 동해, 한반도의 막내 독도 전경,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자태를 뽐내는 무궁화, 김정호의 대동여지전도, 중국의 태극도형보다 4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알려진 경주 감은사 금당 동남쪽 기단 장대석의 태극문양. 〈한겨레〉 자료사진, 연합뉴스, 문화재청 제공
민족상징의 꽃은 역시 무궁화다. 무궁화가 아름답지 않다는 비판과 자조도 심하다. 그러나 한반도를 일찍이 근역이라 불렀음을 고려한다면, 함부로 꽃을 꺾을 일이 못된다. 중국 산해경에서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고 하였다. 적어도 수천년 전에 무궁화가 한반도에 피고 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분명한 것 하나가 있으니, 무궁화의 상징화는 아무래도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과 밀접한 것이니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류가 그것이다.

태극기도 빠질 수 없다. 그러나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충성을’ 다 바쳐야 하는, 일제의 황국신민서사 같은 군국주의·국가주의형 틀은 깃발을 내려야 할 것이다. 국기와 국민, 충성과 맹세, 그러한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월드컵 길거리응원에서 태극기가 엄숙과 권위로부터 일탈 내지는 해방되면서 비로소 태극기가 온전하게 되돌아오는 중이다. 태극도설의 철학적 근거에서부터 다양한 태극 도상들이 함의하는 디자인의 다양성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손길이 미쳐야 하리라. 논의 과정에서 누락되기는 하였으나, 분단된 상황에서 태극기와 인공기 사이에 있는 ‘한반도기’가 지니는 중간자·과도기적 존재가치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주강현 한국민속연구소장(*후원 : 대한항공)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태극기 한글 고인돌…한국대표 상징 떴다

문화부, 100대 문화상징 발표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민족문화상징 100

태극기, 독도, 무궁화, 한글, 김치, 길거리응원, 고인돌 …. 우리 삶에 친숙한 이땅의 여러 자연문화 유산과 한국 근·현대 일상문화의 여러 특징적 현상과 사물들을 망라한 ‘100대 민족문화 상징’이 선정되어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거듭난다.

문화관광부는 100대 민족문화 상징 목록을 발표했다. 문화부 쪽은 “한민족의 문화 유전자를 찾고, 민족 문화의 긍정적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자 1년 남짓 전문가 연구용역과 자문, 여론조사를 거쳐 목록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100대 민족문화 상징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민족이 공간·시간적 동질감을 바탕으로 형성해 온 문화 산물 가운데 대표성을 지닌 100가지를 간추린 것이다. 민족, 강역과 자연, 역사, 사회와 생활, 신앙과 사고, 언어와 예술 등 6대 분야에 걸쳐 한국적 정체성이 뚜렷한 상징물들을 아울렀다.

문화부 쪽은 “민족문화의 원형질적인 상징성, 문화 콘텐츠 활용성, 유네스코 지정문화재 등 세계화 기여도, 남북에 공통되는 통일문화적 성격, 독도·고구려 벽화처럼 국제적 쟁점 대상 등을 선정기준으로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문화부는 이와 함께 100대 문화상징을 문화예술 산업 창작 콘텐츠, 관광로 개발, 교육용 도서 제작 등 다방면에서 활용하기로 하고 올 하반기에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문화부 국어민족문화과 쪽은 “8월 중 100대 문화상징의 효과적 활용을 위한 연구 용역을 맡겨 연말까지 구체적인 활용 계획을 확정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정자나무서 거문고가락까지…한민족 ‘삶의 보고’

나이테에는 나무가 살아온 내력이 기록되어 있듯이
100대 상징의 ‘대표주자’들은 민족의 역사와 삶을 웅변한다.
그것을 ‘결’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결의 넓이와 깊이를
고스란히, 정확히 드러내는 일은 매우 소중한 작업이다.
user posted image
user posted image
이 글을 쓰는 순간, 나는 청소년 100여명과 함께 한반도호를 타고서 부산을 떠나 독도를 향하고 있다. 해양역사문화체험활동(부산YWCA 주관)의 일환으로 청소년들이 배를 몰고 독도에 입도하는 순간이다. 배위에서 노트북으로 원고를 쓰고 있으며, 곧바로 신문사로 보낼 것이다. 역시 ‘정보통신(IT)강국’답다. 그 ‘현대적’ IT가 ‘당연히’ 문화관광부 선정 대한민국 100대 ‘민족문화상징’에 포함되어 있다. 민족문화 상징화 작업이 복고주의적 취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것임을 증명한다.

나이테에는 나무가 살아온 내력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개껍질에는 밀물·썰물의 드나듬이 촘촘히 각인되어 살아온 내력을 웅변한다. 100대 상징에 포함된 각각의 ‘대표주자’들도 그야말로 민족의 역사와 삶을 고스란히 웅변한다. 그것을 ‘결’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살아온 ‘결’은 속일 수도 없으며 과장도 불가하다. 결의 넓이와 깊이를 고스란히, 정확히 드러내는 일은 매우 소중한 작업이다.

가령, 100대 상징에 포함된 동해와 독도의 예를 들어보자. 북한이 동해로 미사일을 쏘았다고 하였을 때, 외신들은 일제히 일본해(Sea of JAPAN) 지도를 보여주었다. 국제사회에서 동해보다 일본해를 선정한 결과이다. 우리가 오랜 동안 ‘동해’로 불러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장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역사의 결을 공고하게 알리지 못한 ‘죄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동해의 결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조금 고단하지만 ‘정치적 독도’로서만이 아니라 독도 주변 수중세계의 동굴이나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넓고 깊게 들어가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 나무의 뿌리, 그것도 뿌리 깊은 나무, 특히 본줄기 못지않게 잔털에까지 이르는 미시적 주제까지 포괄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결이 드러나지 않는다.

민족문화 100선이 아니라 ‘상징’ 100선이다. 상징화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독도 물 속의 동굴을 탐색하는 작업과 같다. 원형질, 심층, 저변, 속내 등등의 연관 단어들이 기호처럼 춤을 출 것이다. 민족 상징물의 층위를 밝혀내는데 그치지 않고 원형질의 단단한 껍질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그 무언가’의 창출을 기대해본다.

user posted image

대장금이 뜨고, 아무개 아무개가 한류스타로 뜨거나 가라앉는다고 일희일비할 때가 아니다. 문화 경쟁력이 해당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걸만한 든든한 무기라면, 그 중심에 민족문화가 전략적 무기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 교과서적인 주의주장이 별로 들어먹히지 않는 것이 또한 한국 문화계의 현실이다. 그러나 한류의 전략적 무기로서 민족문화를 포기, 방기하였을 때, 그 결과는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한지, 한복, 한식, 한옥, 심지어 ‘길거리응원’까지 100대 상징에 포함되었다. 비극이자 현실인 비무장지대로부터 아이들 잔치에 불려나오는 도깨비, 마을공동체의 듬직한 정자나무로부터 거문고가락까지 무려 100개다. 빠진 것들은 없을까. 당연히 누락된 것들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상징적 층위’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들 100개를 키워드 삼아 충분히 우리 문화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현상에 관한 개별적 이해, 독립적 해설 따위가 1차적 독해 방식이라면, 중층적·학제적·종합적 이해방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또한 문화콘텐츠로서의 분명한 지향점을 제시하고, 한류의 든든한 보루로서만이 아니라 문화강국의 토대로서 상징화 작업이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문화강국의 이미지화가 국가주의적 발상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며, 촉촉하게 젖은 섬세한 잔뿌리까지 챙길 수 있음으로써 작은 역사, 작은 문화를 더불어 할 수 있는 방식이 되어야 하리라.

독도를 둘러싼 거대담론으로 거듭 성명전과 심리전이 파고를 드높인다면, 수중의 동굴에는 자리돔들이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감태군락이 생명의 숲을 이루고 있다. ‘인문의 바다’에서 이같은 ‘생명의 숲’을 찾아나서는 일, 그리고 그 숲의 주소 성명을 분명히 하면서 민족문화적 정체성을 되찾는 일, 그것이야말로 한겨레 삶의 보고를 재확인시켜주는 지름길이 아닐까



相关评论


  • 我来说两句
  • 严禁发表侮辱、诽谤、教唆、淫秽等内容的评论:(不能超过250字,需审核后才会公布)
网站简介   ㅣ    繁体中文    ㅣ    联系我们   ㅣ     加入收藏
:: 추천사이트   
Copyright ⓒ 2007 arirang-world.org All Rights Reserved.     아리랑토론광장